박정희의 과거행적만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은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2005년에 있었던 “박정희 시대와 한국근현대사”라는 학술대회에서 “박정희를 전지전능한, 혹은 세계적 경제학자로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로 규정하는 것도 ‘신화’에 불
1. 똑바로 살아라 - 변절의 역사, 변질의 역사
01 죽은 지 25년이 넘은 박정희는 정치사회에서 다시 화두 되고 있다. 왜 박정희는 2005년에 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가? 역설적으로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낸 것은 김영삼대통령이었다. 김영삼 말기에 부패와 실정, 그리고 경제난이 겹치자 사람들은
20일부터 제 6차 한일회담 본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제 3공화국이 들어선 후 1964년 12월 3일 제 7차 회담이 개최되었다. 6차 회담에서 양국은 단순한 사무만이 아닌 정치 절충도 시도했다. 회담 중에 박정희와 이케다 수상 사이에 “조속한 시일 내에 각 현안에 대한 원만한 타결을 보고 국교를 정상화한다
1. 향토예비군 창설
1.1. 창설배경
군사쿠데타와 함께 시작된 박정희 정권이 반공체제를 강화하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에 당황한 북한은 대남정책을 평화통일정책에서 무력적화통일정책으로 전환시켰다. 1962년에는 쿠바사태 1962년 10월 22일
2. 한국의 외교사
1.2.1. 광복 이전의 외교
1.2.1.1. 삼국시대의 외교
1.2.1.1.1. 고구려
삼국 중에서 고구려는 국가 체제를 가장 먼저 정비, 도읍을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1세기 후반 태조왕 때 정복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광개토왕 때는 만주지방을 대부분 정복 하였고 신라 내물왕이 원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