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정부기구
1. 대한제국의 성립
(1) 아관파천
국민의 대일감정이 악화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친위대 주력이 지방에 동원되어 서울의 수비가 허술한 틀을 타 러시아 공사 웨베르(Karl I. Waeber)는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수병 100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그리고 친노파 이범진과 밀의하
Ⅰ. 개요
개항 이후, 대한제국기를 거치면서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전통사회에서의 가치와는 다른 반전통적인 신사회를 표방하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한말 신학계열 지식인들의 주장 속에서 전시대와 구분되는 몇 가지의 중요한 전환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지식인들에게 전환적 사
대한제국에는 황제만 산다.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p36
따라서 민국이념을 지향한다고 해서 근대화를 지향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이 진정한 민국이념을 지향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근본이 임금과 백성 모두라고 본다면 왜 고종이 집권
(2) 전환기 국가로서의 대한제국대한제국은 이전의 조선왕조와도 달랐지만 그렇다고 근대 국민국가라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단계, 전환기 국가로 판단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맥락으로 보면, 봉건적인 분권경험을 지닌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5백여 년 동안 전제적
1.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군사제도(軍事制度)
아관파천기에 군사력 증강에 관심을 보인 고종(광무황제)은 1896년 10월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여 러시아식 군사훈련에 의해 800명 규모를 양성한 바 있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1897년 2월 조선의 군인은 대략 4천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규모였으니, 대한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