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해 전면적으로 회의하고 있어, 이 시기에 대한 연구 자체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내재적발전론’ 측면에서의 연구는, 고종이 지휘하고 관료들에 의해 뒷받침됐던 광무 정권이 강한 개혁적 의지를 가지고 독자적인 발전을 모색했다는 가능성을 최대한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환지략을 서술했다. 양무운동 시기의 동문관의 교과서였다.
등의 양무서(洋務書)를 읽으면서 바깥사정에 귀를 기울였고, 서양인 선교관과 고문관을 통해 서기를 수용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나름의 문명수용의 과정을 거쳐 군주가 직접 근대화 정책들을 추진한 것이다. 또한, 여러 차례의 보고를 통
내재적발전론’ 측면에서의 연구는, 고종이 지휘하고 관료들에 의해 뒷받침됐던 광무 정권이 강한 개혁적 의지를 가지고 독자적인 발전을 모색했다는 가능성을 최대한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이 제공했다는 소위 `시혜‘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대한제국이
대한제국 재정 정책은 주먹구구식.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p85
고종의 매관매직은 <매천야록> 정축년(1877) 봄에 정시 문과를 설치하여 5명의 급제자를 냈다. 이 때 남정익은 의부 부윤으로 있으면서 돈 10만 꾸러미를 상납하고 그의 아들 남규희를 수석으로 급제시켰다. 그리고 그 밖에 4명도 고종의 낙점
내재적발전론의 논리에 대해 확실한 근거로써 반박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대한제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 ―식민지 근대화론과도 연장선상에 있는― 에 대해 흔히 오해를 하는 점은 이들의 입장이 일본이 대한민국을 근대화 시킨 것이라는 논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