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때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친일 관료들과 일본의 압력이 거세지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1년을 그곳에서 머문 고종은 경운궁 재건사업을 통해 경운궁을 수리하여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 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하고 원구단에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하면서 경운궁을 중건하였다. 경운궁 주변은 1880년대에 이미 서양 여러 나라의 공사관 부지로 떼어주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잘려 나간 모양이었다. 또한 1904년 역시 일제의 방화로 추정되는 큰불로 인해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등 주요 건물 들이 소실되었다. 혼란한 정국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으면서 근대국가와 근대사회를 수립하여야 하였다. 강만길, “한국사12 근대민족의 형성-2”, 한길사, 1994,
갑오개혁 후 고종은 1897년 국호(國號)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고 광무연호를 사용하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주로 보수파와 함께 개혁을 진행하였
-덕혜옹주에 대한 황제의 사랑이 묻어나는 ‘준명당’-
고종 시절 세워졌으며, 업무처리 와 직무를 보던 곳이었으나 , 1912년 고종황제의 고명딸인 덕혜옹주가 태어나 자라면서 유치원으로 사용 되었다고 합니다. 복도로 이어진 공간 아래계단을 보면 흔적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딸의 안전을 위해 별
제국인 대학제국을 성립시킨다. 이 대한제국기는 구한말 어지러웠던 역사의 정가운데에 있는 시기로서 그 의의를 다시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제국의 성립배경과 과정, 그리고 광무개혁에 관하여 대한제국의 성립부터 멸망까지의 현장이 된 덕수궁을 둘러보고 그 역사적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