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
Ⅰ. 덕수궁 약사
현재의 덕수궁은 궁궐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덕궁이 불타버려, 대신에 이 저택이 환도한 선조의 행궁(임금이 임시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 후 점차 확장함으로써 비로소 궁궐의 기능을 다 할 수 있게
덕수궁 안에는 다른 궁궐과 달리 서양식 건물이 있을 수 있을까? 이제 내가 직접 본 모습과 역사 조사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아보겠다.
2. 덕수궁에 관하여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넓이 6만 1500㎡.
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던 곳으로, 임진왜란 뒤
덕수궁의 역사
<창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의 전신은 정릉동 행궁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 밖으로 피란을 갔다가 돌아왔더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곳을 행궁으로 삼게 되었는데, 그 건물의 영역과 규모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