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한 새로운 사업으로 청년회는 편집부를 따로 두고 월간잡지 『개벽』을 창간하는 한편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전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2년 교단의 주요지도자인 오지영․김봉국 등 천도교련합회의 일탈과 의암 손병희의 순도, 사회주의의 보급에
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설립된 보안회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 중 략 … ≫
Ⅱ. 도마안중근의사의 연혁
안중근은 조선 왕조 말엽인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읍 광석 동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은 고려말의 이름난 유학자 안 유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안인수는 진해
의에서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설정하고, 그곳에 군관학교를 창설하여 많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해 냄으로써 장차 국권회복을 도모할 것을 의결하였다. 세 번째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 장교들의 항일무장 독립군진영으로의 가담이다.
≪ … 중 략 … ≫
Ⅱ. 독립군부대의의거(
안중근은 “세계의 대세를 짐작하고 해외에서 신호읍을 하는 자 어찌 무모하게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자가 있을 것인가. 이등박문의 정책이 동양평화에 지대한 해를 끼치는 일에 一身 一家를 돌볼 여지가 없이 결행한 것”이라며 의거의 명분과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이토히로부미와 아무런 개
안중근은 대한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프랑스 선교사 르각을 만나게 되었다.
일제의 한국 침탈에 직접 항거하기보다는 진정한 실력양성의 방법을 권유하는 르각 신부의 말에 크게 감동하였다. 결국 1905년 12월에 상하이 이주를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3)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교육사업안중근은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