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기지를 설정하고, 그곳에 군관학교를 창설하여 많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해 냄으로써 장차 국권회복을 도모할 것을 의결하였다. 세 번째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 장교들의 항일무장 독립군진영으로의 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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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독립군부대의 의거(봉오동전투)
1920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회견을 위해 만주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같이 이토 암살계획을 세운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한 안중근은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 한 후 환영군중 쪽으로 이동할 때 뛰어나와 권총을 발사한다. 안중근은 이토
독립군 토벌을 위해 침입한 일본군 동지대 소속의 산전연대(山田聯隊)를 크게 격파한 전투로 한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청산리전투라 할 때에는 대한군정서는 물론 이도구 어랑촌 부근의 산림지대에 집결한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연합부대(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대한국민군․훈춘한민회&
Ⅰ. 독립운동가 백암 박은식 선생
선생은 국망의 위기 상황에서 구국과 국권회복 운동의 논리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이에 기반하여 여러 방면에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사회와 민족, 그리고 국가간의 생존경쟁을 천연(天演)의 공리로 이해하는 사회진화론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