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서기론의 구체적 논리와 사상적 기초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분석과 접근은 사실상 미비한 편이다. 이보다는 온건과 급진 양 집단 간 주장의 차이, 개화추진에 있어서의 속도의 차이, 개화정책을 단행하기 위한 정권창출에 대한 노력의 유무 등에 따라 개화파를 구분하면서 개화론을 확대
1. 서 론
1860년 영국과 프랑스 동양함대가 연합하여 중국을 또 공격했는데, 1개월 만에 중국은 수도 북경을 점령당해 버리고 청국황제는 만리장성을 넘어 북으로 도망하여 열하에 피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동양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인 중국의 서양의 무력 앞에서 힘없이 굴복하여 수도까지
서론
동도서기론이란 동도로 지칭되는 동양의 도덕과 서기로 지칭되는 서양의 문물제도를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으로써, 당시 서양문물수용과 함께 제기되고 있었던 사상인 위정척사와 개화사상과는 또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인식이다. 동도서기론 연구는 현재까지 그 사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창시는 지배층의 착취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19세기 후반의 사회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은
개화파
(개화당)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 변법적 개화 및 국정 전반에 걸친 대경장 개혁 추구
- 청국의 적극간섭 정책과 속방화 정책에 적극 저항
- 정변의 방법도 불사, 조정의 중간 관직에 다수 진출
온건개화파
(중간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 동도서기(東道西器)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