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이 얼마나 일본의 재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졌었는가를 알 수 있다.
동학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는 한사코 이를 싸워 물리치려는 강력한 저항민족주의를 정립하여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의 민족주의를 더욱 근대적으로 만들어 하위신분층과 농민층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게
농민반란',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등 으로 많은 해석이 있다. 그 중에서도 주로 실패한 혁명이냐 혁명운동이냐라는 문제와 혁명으로 보기에는 힘든 아직 혁명이나 혁명운동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농민봉기, 농민전쟁, 농민운동으로 보느냐로 크게 나누어 볼 수있겠다.
1894년에 일어난 갑오동학
전쟁도발에 나서게 되고 민족적 위기를 의식하게 된 농민군들은 반외세항거와 지켜지지 않은 폐정개혁안에 대한 반발로 다시 한번 2차 봉기를 한다.
민족적 위기와 봉건적 위기를 중첩하여 직면하게 된 상황에서 동학이라는 종교가 농민들과 만나게 되었다. 종래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의 관계에
갔다.
그러한 민중들의 불만은 종종 민란의 형태로 표출되었으며 홍경래의 난(1811),진주민란(1862)
등은 그 대표적 예로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민란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 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반침략적이고 반외세적이며 민중적인 종교인 동학이 대두하였 다.
농민항쟁을 계속 벌였다. 이 같은 농민항쟁을 전국적으로 통합하는 데는 동학(東學)의 포교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학은 봉건적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반침략적 지향도 나타냈다. 동학은 사회변혁을 위한 인간의 실천적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약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