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다.
그러한 민중들의 불만은 종종 민란의 형태로 표출되었으며 홍경래의 난(1811),진주민란(1862)
등은 그 대표적 예로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민란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 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반침략적이고 반외세적이며 민중적인 종교인 동학이 대두하였 다.
농민전쟁의 농민집강소의 단계로 청군과 일본군이 갑오농민전쟁에 개입하자 이 두 나라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하여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되고 집강소를 전라도 53개 군현에 설치하여 농민통치를 실시했던 단계이다. 제 4단계는 갑오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혁명의 단계이다. 동학농민군
전봉준 등 남접 세력들은 사회변혁을 위해 동학교단 상층부를 움직이는 것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남접 또는 전라도 고부라는 한 고을의 농민무장봉기로 그 방향을 바꾸어 추진하였던 것이다.
1893년 고부는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 그리고 전운사 조필영, 균전사 김창석의 탐학까지 가세되어 농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보다 확대된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의 폭압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빌미로, 요호부민들을 잡아다 난의 주모자로 몰고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동학농민전쟁 과정에서 일어나 싸움을 벌인 것은 서포라 했으니 서장옥 호 일해. 수원 사람이라 전해진다. 강경 노선을 펼쳐 온건한 교단 지도부와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전봉준을 제자로 거느리고 새로이 ‘남접(南接)’이라는 세력을 구축하였다. 농민전쟁시기 감옥에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