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부민란의 배경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고부군의 민란에서 발단하여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농민봉기와 합류하여 일대 농민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고부군수는 민씨일파
와 결탁하고 있었던 척족 조씨(순조의 세자 익종의 부인이 조씨) 가문에 속한 조병갑이
동학이 얼마나 일본의 재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졌었는가를 알 수 있다.
동학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는 한사코 이를 싸워 물리치려는 강력한 저항민족주의를 정립하여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의 민족주의를 더욱 근대적으로 만들어 하위신분층과 농민층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게
사상으로의 흐름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 생명사상이 종합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바로 '토지'이다. 박경리에 의하면 '존엄성은 바로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가장 숭고한 것을 지키는 것'(파시 제1권, 131면, 1993)인데 박경리는 그의 작품에서 이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생명본능 이상으로 중요한 것임을
전쟁으로 인한 1842년의 난징조약, 애로호 사건으로 인한 1858년의 텐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고 이후 열강의 무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베이징조약을 체결한다. 이 같은 소식으로 미루어 최제우는 민족적 위기에 대한 자신의 위기의식을 ‘순망치한(脣亡齒寒)’에 빗대어 ‘보국안민의 계책’으로 동학
동학농민운동을 차근차근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1. 갑신정변
개화파의 형성배경: 18세기 후반기에 이미 북학파의 박제가와 같은 진보적 사상가들은 쇄국주의를 청산하고 민간상인의 외국무역을 허용하며 서양인 선교사를 초빙해 그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그것이 19세기 중엽에는 이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