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부민란의 배경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고부군의 민란에서 발단하여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농민봉기와 합류하여 일대 농민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고부군수는 민씨일파
와 결탁하고 있었던 척족 조씨(순조의 세자 익종의 부인이 조씨) 가문에 속한 조병갑이
전쟁의 결합설‘이 그것이다. 앞으로 이 글은 세 번째 주장인 신용하의 ’동학과 농민전쟁의 결합설‘에 초점을 맞추어 동학과 농민전쟁과의 관련성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신용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의 결합」,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2~3쪽
또한, 갑오농민전쟁의 역사적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같은 선각자들에 의해 지도되어 개화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된 사람들이 바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과 같은 서울양반 가문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외에 위의 선각자들 의 지도는 물론, 청으로의 사행을 통해 서구
농민생활과 서울의 하층민의 경제적 압박이 가중되자 이들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상황 속에서 조선에서는 현재까지의 개화정책보다 조금 급진적인 개혁을 꿈꾸는 움직임과 함께 심화되는 민생고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년도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했지만 30~40만의 희생자만 남긴채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개혁의지는 갑오개혁을 거쳐 3.1운동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지만 당장은 봉건사회의 지주-소작관계를 청산하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를 불러들여 청일전쟁을 유발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이후 명성황후 시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