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사건이다. 마녀사냥의 절정기는 보통 근대 초기로 구분되는 16-17세기이고 전체적으로도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마녀사냥은 교회 법원으로부터 세속 법원으로 재판의 주도권이 이전된 시점에서 비로소 폭발적으로 번져나갔으며, 근대의 기준점의 하나로 제시되는 종교개혁
이교 축제에 대한 기억은 마술 개념에 있어서 사바트(sabbath‘)라고 하는 개념의 근거로서 크게 작용하였다. 풍요로운 농사, 혹은 태양의 주기와 관련하여 행해지던 고대의 이교 축제는, 그 규모와 안 좋은 평판과 교회에 의한 왜곡 등으로 인하여 마녀의 대규모 집회인 사바트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마녀를 찾아냈다. 그 일은 대개 사법관이나 간혹 전문 마녀사냥꾼이 수행했다. 그들은 대개 사람들의 고소나 고발 그리고 간혹 소문을 듣고 요주의 인물을 검거했다. 그리고 혐의자를 심문할 때 그들이 지닌 권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백을 받아냈다. 대부분의 마녀사냥은 피의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
마녀에 대해 온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1300년을 경계로 하여 사태는 일변한다. 마녀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돌연 강경해진 것이다. 마녀사냥의 모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단을 심문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12세기에 들어 격화된 이단의 움직임은 교회를 긴장 시켰고 또한 근대 초기 유럽에서 발생한
보통 사람들은 ‘마녀사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중세 시대에 행해졌던 이단심문재판소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의가 그 생각으로부터 쏟아져나오게 된다. 즉, 약자(여성)를 향한 집단적 광기(정확한 증거가 없는 잔인한 고문의 형태로 표출되는)를 마녀사냥이라고 하기 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