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명성황후의 인품
명성황후의 생전의 인품에 대해서는 그녀의 사후를 기록한 행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아름답고 총명하였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장영숙, “서양인의 견문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1864년 고종12세로 즉위/ 대원군 이하응의 섭정
1866년 철종의 3년 상이 끝났고 고종의 친정논의
1867년 민자영, 왕비로 간택
(고종의 나이 15세, 민자영이 16세)
간택배경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정치 타도
왕권을 강화
외척의 세도정치를 원천 봉쇄
한미한 집안의 고아 소녀
1863년 고종(高宗)
명성왕후, 그가 역사에 남긴 빛과 그림자
I. 들어가기
11월 6일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103년이 되는 날이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한 듯 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우선 그에 대한 호칭마저도 온전치가 못하다. 민비? 명성왕후? 혹은 명성황후? 그
Ⅰ.서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국가의 상징인 궁궐이 수백 명의 일본군인과 자객들에 유린당하고 국모가 일본인 흉도의 손에 시해 당한 사건이다. 그녀의 처참한 죽음은 당시 항일 의병활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오늘날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최대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정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사건)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했으나
명성황후가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
정책을 강화하자 일본인들은‘여우사냥’
이라는 작전명으로 명성황후 시해를 자행
한다. 일본 자객들이 8월 20일 침궐하였
고, 경복궁 옥호루에서 자객들에게 시해
당하고 운반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