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화사상과 존주대의론에 심한 반발을 보였으며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각과 긍지를 분명히 하였다. 또 실학의 민족적 성격은 당시 서양문물과 과학지식에 자극되어 세계관 확대에 따른 자아의 각성으로 강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란 주장을 통해 더욱 확신되었다. 가령 지구구체설이나 지
사상적 배경
초기 명청 교체기 시기에 대립된 사상은 명분론과 형세론이었다. 명청 교체기 전부터 내려오던 화이론이나 모화사상에 힘입어 나타난 명분론이 형세론에 비해 강세를 이루었다. 이후 인조 집권 시기에는 명분론은 주전론으로 형세론은 주화론으로 발전되어 그 대립은 더욱 심해지게 된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사로잡힌 귀족 관료적 고답성으로 대치된 결과라고 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이전의 어느 시가와도 관계없이 한 학자의 소일파적(消日破寂)으로 이 형태가 발생되었다고도 하며, 그 기본 음조는 중국의 사(詞)나 사륙(四六)의 모방이나, 전후절의 분단은 향가 형식에 의함이고, 그
모화는 인간과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귀신과의 생활을 지속해 나간다. ‘무속 서사문학을 구술할 때 우리들의 샤먼, 우리들의 무당은 삶을 향해 열려있는 죽음을 지닌 아주 희귀한, 그래서 매우 높게 선택 받은 존재이다.’ 김열규, <샤머니즘의 문학적 의미>, 『문학사상』, 1977.9, p287
김정희(1786~1856)의 자는 원춘이며, 완당ㆍ추사ㆍ예당ㆍ시암ㆍ과파ㆍ노과 등 백여 개의 호를 가지고 있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정조 10년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뒤에 큰아버지 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