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산(남산)에 위치하여 목멱산 봉수라 불렀다. 이는 서울 남산의 능선에 5군데 설치되어 있다.
거화 방법은 정세의 완급에 따라 구별하였는데 세종대왕 때부터는 5거로 해상과 육상을 구별함으로써 보다 진전된 방법이었다. 즉 아무도 없을 때에는 날마다 주기적으로 1거, 해안 지방의 경우 적이 바다
≪남산골 한옥마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2가 84- 일대
- 조성기간 : 1993년 12월 28일 ~ 1997년 12월 31일
1. 남산에 대하여
서울의 상징이며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남산은 이름이 다양한데, 도성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이요, 본명은 목멱산(木覓山)이다. 도읍을 옮긴 후 서울(京)을 개성에서 이곳
목멱산, 북쪽의 백악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그 터전으로서, 성 밖의 일부지역도 관할했지만, 원칙적으로 성안의 구역만을 장안, 문안, 한양이라 하였다. 손정목,『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 일지사, 1977, 35쪽.
서울은 본래 도시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 아니다. 수도로 정해지면서 계획된 도시였기 때문
1. 한성부
조선시대 한성부 행정구역의 범위는 백악산에서 인왕산을 거쳐 목멱산 정상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낙타산을 지나 다시 백악산으로 연결되는 약 18Km의 도성안과 도성 밖 10리로 하였다. 도성으로부터 10리까지라 하더라도 그 경계는 대체로 산능선이나 하천으로 하였기 때문
목멱산 남쪽에 있는데, 그곳에는 맑은 샘물이 산에서 쏟아져 내려오고 절의 동쪽에는 큰 소나무들이 가득하니 성안의 부녀자들이 피륙을 세탁하고 바래기 위해 이곳에 많이 모였다… 남산 남쪽의 이태원 마을 사람들은 차삼(茶蔘)을 심고 홍아(紅牙)를 경작하는 일을 좋아한다." 조선시대 성종 때,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