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 전공에서 바라보는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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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보통신 전공에서 바라보는 세종대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처음 이라는 주제를 보았을 때의 막막함이란 말할 수 없었다. 기계라던가 재료 또는 건축에 있어서 세종대왕 때의 업적이란 위인전기나 역사 교과서에서 종종 들어왔지만 전기라는 분야는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공학이라는 것은 수학이나 물리, 화학과 같은 순수이론을 실제 생활에 도용하는 학문으로 지금에 와서는 적은 투자로 얼마나 많은 이윤을 창출 할 것인가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활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전자정보통신도 활용하는 재료가 다를 뿐이지 조선시대 생활에 스며있을 것이다.
인간이 전기를 발명하고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전자라는 개념을 도용하고 반도체를 활용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역사라고 볼 수 없다. 단순히 전기라면 해가 없는 밤의 생활을 낮과 같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대중매체의 선두주자인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물론 전기의 대부분을 이러한 전자 기기의 활용에 이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전기를 이용하는 것, 대중매체를 활용하는 것은 의사소통이나 정보의 전달을 위해서이고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의 선조 특히 세종대왕은 전기가 아닌 다른 재료를 활용한 것뿐이다.
단순한 발성이나 기호로 의사를 전달했으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류가 가장 먼저 ‘창조’한 것은 문자가 아닐까 한다. 서로의 의사소통을 위해, 정보를 좀 더 쉽게, 정확한 의미로 전달하는데 문자만큼 유용한 것이 있을까. 세종대왕은 언어의 소통을 위해 발음 기관을 본따 만든 문자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의 원조인 이다. 현재 우리는 훈민정음에서 몇 가지 글자를 소실한 채로 사용하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가장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며 편리한 문자로 찬양받고 있다.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 로마자 등 다른 나라 언어가 수백 가지의 발음을 표현한다면 그들보다 적은 수의 글자로 약 3000가지 이상의 발음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것은 실제 발음하고 있는 표현이며 계산상으로는 약 1만여 자를 표기할 수 있다.
언어는 단순히 음성정보를 지닌 것이지만 문자는 이를 기호화한 것으로 소리에만 의존하던 정보의 전달을 시각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통신에서 보자면 단순한 음성정보를 신호로 변형시킨 것이다.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문자의 창조에 탁월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한자의 모양을 변형해 사용하는 일본어 등의 아시아권 문자와는 달리 에 실린 가림토 문자나 그 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유추되는 기하문양은 그 역사적 근거가 부족해 역사가들의 힘을 얻지 못했을 뿐 존재의 역사는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는 어떠한 이유로 인해 소실되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의도는 한자와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한자를 사용하던 관리나 지식인 등의 권력을 지닌 양반 계층의 반대로 훈민정음이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처음 한글은 한자를 주로 사용하는 지배계층 특히 남자들을 제외한 소외계층으로 그 영역을 넓혀간다.
궁중이나 양반 사대부집 여인네들은 공식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남자들과 달라 한문 교육을 받았지만 점차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반 백성들은 배우기 힘든 한자보다는 한글을 배우는데 이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후에 임금의 교서 등이 한글로 작성되었다는 것으로 한글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에 민간에 널리 퍼져있던 불교는 불경을 백성들이 볼 수 있는 한글로 번역하기에 이른다. 고려시대를 부정하면서 건국하게 된 조선인지라 겉으로는 당시 정치, 행정, 문화 등을 억제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거의 답습하여 개발시켜 활용했다. 종교 또한 국가 중대사나 행사에 유교를 따르기는 했지만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무시할 수 없었다. 효령대군이 불가에 입문하고 궁중의 여인들이 불교를 장려한 것을 보면 조선시대 지배층에도 불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불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특히 세종, 세조 등 한글 창제 및 초기의 사용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왕실 사람들은 불교의 신심이 독실하였다. 궁궐 내에 불당을 지어 놓고 예불을 드리고 활자를 가져다가 불경 찍어 내는 일에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자, 신하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지만 세종, 문종, 세조대에 이러한 사업은 꾸준히 이루어졌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한글로 불경을 읽어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극락왕생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였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한글이 널리 전파되는데 지대한 공을 미친다.
여러 원인으로 한글은 반대에 부딪치지만 이에 무릅쓰고 백성들과 후에는 지배층으로 전파되어 자리 잡게 된다. 만약 훈민정음이 체계적이지 못하였거나 배우기 어렵거나 활용도나 낮은 문자였다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으리라. 지금의 한글은 세계적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문자로써 많은 국가에 전파되었고 문맹퇴치 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디자인이나 예술적 계통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훈민정음은 정보전달 그 이상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며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 수천가지 언어들 중에 문자를 가진 것은 극히 일부이다. 그마저도 많은 수가 소실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소멸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은 의사소통이나 정보전달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며 발전되어 가고 있다.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단순히 입에서 전달되어지는 언어뿐만 아니라 많은 체계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군사적인 목적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돌아볼 때 일상생활이 아닌 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나 군사적 목적이 가미될 때 경제며 과학이며 거의 전반적인 부분이 발전해왔으며 경제 활동이 왕성한 지금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제 1, 2차 세계대전이후 눈부신 경제발전과 의학, 과학의 발전이나 윤택한 삶을 위한 아이디어나 제품 등의 근간이 군사제품임을 볼 때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보계통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전화나 휴대폰, 인터넷은 군사 통신용으로 개발되었던 것들이다. 지금은 위성을 띄우거나 통신 회로망을 구축하여 정보를 주고받는다.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지금의 통신장비들이 없었다. 그러나 파발을 띄우거나 봉화를 사용해서 하루에도 2~3번 군사통신을 했었다. 파발이나 우역 등은 사람이나 말을 이용하여 문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지금의 우편제도의 원조가 된다. 이처럼 글자를 원형 그대로 전달하는 것과는 달리 불이나 연기를 이용해 정보의 원형을 변형시켜 전달하는 봉화는 지금의 통신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봉화는 시야를 방해하지 않고 멀리까지 보이는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을 낮에는 연기를 피워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서울에 전하였다. 초기의 봉화는 밤에 피우는 횃불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낮에 올리는 연기까지도 포함해서 불렀다.
봉화는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북미 인디언의 단거리 연락, 그리스의 봉화체계 등 세계 여러 곳에 활용되었다. 우리나라 봉화는 선사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것이 고려시대에도 이어지는데 중국문헌에 의하면 봉수에 순차적으로 오른 불이 송나라 사신을 왕성에까지 인도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가 길고 많은 나라에서 활용하던 봉화를 세종대왕이라는 국한된 시대상황에 그것도 지금의 정보통신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초점에 맞추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바라본다면 그렇지 않음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세종대에 확립된 5단위 부호방식의 봉화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것으로 오늘날의 디지털부호 방식과 유사한 것이다. 세종대왕의 봉수제는 봉화 거수의 선정 그리고 각도 연변의 봉수에 연대를 신축하고 봉수 선로를 일제히 확정하여 면목을 일신한 것 등이었다. 또한 관계법령도 기존의 법령과 대명률을 보완하여 보다 자세한 부분까지 규정하였다. 이때 이루어진 봉수제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후 모든 봉수제도의 근간이 되었으며 단순히 국경에만 한정되고 단거리 통신용으로만 사용하던 타국과는 달리 전국에 걸쳐 체계적인 통신망으로써 그 활용도가 높았다.
봉수는 대략 수 십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하여 조선 전기에는 전국에 650여 개의 봉수가 있었고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올리되 앞 봉수대에서 불이 지펴지지 않거나 안개나 구름에 덮여 봉수의 연락이 불가능할 때에는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 보고하였다. 봉수의 종류로는 경봉수, 연변봉수, 내지봉수 등 세 종류가 있었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 목멱산(남산)에 위치하여 목멱산 봉수라 불렀다. 이는 서울 남산의 능선에 5군데 설치되어 있다.
거화 방법은 정세의 완급에 따라 구별하였는데 세종대왕 때부터는 5거로 해상과 육상을 구별함으로써 보다 진전된 방법이었다. 즉 아무도 없을 때에는 날마다 주기적으로 1거, 해안 지방의 경우 적이 바다에 나타날 경우이고 내륙에서는 적이 국경에 나타났을 때 사용하는 2거, 해안지방에 왜적의 배가 근접할 경우이고 내륙에는 적이 국경에 근접했을 때 3거를 올렸다. 상당히 긴박한 상황으로 해안지방에는 아군의 병선과 접전할 때이고 내륙에는 적이 국경을 침입했을 때는 4거, 왜적이 상륙하였을 때에나 내륙에 군이 접전하고 있을 때는 5거씩 올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