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발표한 1946년에서부터 4.19가 일어난 1960년에 이르기까지 자유는 설움, 비애라는 소시민적 감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된다. 1960년에서 61년에 이르는 사이, 그것은 사랑과 혁명으로 설명되며, 그 이후의 시작 활동에서는, 그것이 불가능케 하는 적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그대로 수락할 수밖에
평가하고 있고, ‘예술파’의 전위들(전봉건, 정진규, 김춘수 등)은 작품에서의 ‘내용’제거만을 내세우지 작품상으로나 이론상으로 자기들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최하림 편저, 『김수영』, 문학세계사, 1995, pp. 263-274. 이하 시론이나 시에 대한 반박 등은 이 책에서 인용하였다.
김수영의 문학은 당대 문학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지향점을 찾았다는 것과 문학을 삶의 영역으로 끌어안고 동시대의 삶과 유리된 음풍영월의 시나, 정신은 없고 ‘코스츔’만 있는 사이비 모더니즘의 시를 실천적으로 극복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즉 모더니즘을 기법의 측면이 아닌 정신의
시인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참여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김수영과 신동엽으로, 참된 시민 의식적 시인으로서 통찰과 안목을 발휘한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거대한 뿌리>, <풀> 등의 작품이 있으며, 강인한 참여정신을 가지고 건실한 역사의식을 작품 속에 투영한 신동
시인이 아니라 영화감독으로도 자리 잡았다는 자신감이 드나?"
"건방진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30대에 시를 통해 다 겪어봤다. 누릴 만큼 인기를 누려봤고, 비참하게 망가져 보기도 했고. 5년간 경마장을 배회하면서 ‘똥말’에 베팅도 해봤다. 노자 말씀에 총욕약경(寵辱若驚)이란 게 있다. 총애를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