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고증학적인 실증에 의하여 역사를 서술할 것을 표방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이들은 한국사에 대한 많은 사료를 수집‧정리‧발간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리고 이러한 사료들을 분석‧정리하여 그들 나름의 새로운 한국사를 서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처음부터 분명한
문헌고증학에만 의존하였던 까닭으로, 한국사가 지닌 민족의 내적 경험의 성장과정의 주류를 파악하고 이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정상적인 방향은 취할 수가 없었다. 이때에 많은 고대사가 당시 학자들에 의해 사라지거나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흔히 말하는 식민주의 사관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특
Ⅰ. 머리말
한국사 시대구분에 관한 토론회는 남한의 경우에는 1967년에서 1968년에 걸쳐서 처음 있었다. 이때는 4월혁명 이후 민족사학의 발전 속에서 일제하 식민사학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비판 극복함으로써 한국사의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인식되었고, 그것을 위한 체계화
(1)북한의 역사관-주체사관의 등장을 중심으로
현재 북한 역사학의 핵심적 이데올로기이자 북한의 역사관을 가장 잘 대변하는 주체사관을 설명하려면, 먼저 해방 이후 북한의 체제가 정립되면서 제시된 유물사관에서 출발해야 한다. 1940~1960년대 북한의 역사 연구는 가히 남한보다 활발했다고 해도
『열하일기』, 담헌 홍대용의 『연기』, 박제가의 『북학의』 등이 있다.
3.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고증(考證)적 입장으로써 경서 및 금석․전고의 고증을 위주로 하였는데,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엄격하고 객관적인 태도로써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역사, 지리, 문화 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