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으로부터의 군수물자의 이동과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인부대의 이동 및 북한의 병력배치 상황 등에서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보기관 역시 북한에서의 변화를 면밀히 파악하고 주시하면서도 전쟁발발의 긴박성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워싱턴은 무엇보다도 소련의
북한의 도발을 직접적으로 유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소련의 승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타이완의 공산화와 비민주적인 타이완 정권에 대한 방위도 반대하였다. 한국에 대해서는 미국의 목표가 경제재건과 체제안정이었기 때문에 이승만대통령의 북진 정책을 경계하는 입장을
이승만은 계속적으로 정전에 대한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을 내걸으면서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게 되고, 미국과 중국이 철수하는 경우, 남한의 독자적인 힘으로 북진통일을 이루려는 의도를 내비치게 된다. 미국은 이러한 이승만의 반응이 나온 직후 “에버레디 계획”에 의해 유엔군으로 이승
북한의 전쟁 준비는 미군의 첩보조직에 확실히 포착되고 있었다. G2는 북으로의 사단 이동, 50년 3,4월 침공설 , 6월 침공설 등을 보고한다. 와다 하루끼는 명백한 정보에도 미국이 전쟁의 위험을 느끼지 않은 것은 북한의 행동에서 소련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그들이 전쟁에 대한 의도에 대해 미국은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