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민화는 설화성이 강하다. 중국 민간연화는 상징만으로 회화를 표현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민화에서는 상징에 설화성을 가미하여 희화화시키는 여유를 발견할 수 있다. 민화에서는 본래 왕공사대부 설화라도 같은 소재의 서민들의 이야기로 바뀌고, 서민 취향의 형상으로
민화라 할지라도 똑같은 점이 없이 생활 공간에 맞는 크기와 구도, 형태와 색상, 선과 점들을 어울리게 한 것이 민화라 할 수 있다.
민화는 우리 민족의 생활 습관과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고 정통회화와의 차이점을 지닌 독창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서민계층에 의한 그림으로서 고급미술로서의 정통
주렁주렁 열린 화조도가 제격이었다.
수연이나 회혼례 때에는 주인의 일생을 다룬 평생도를 주문하여 장식했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그림으로 분위기를 한결 북돋았다.
이처럼 한국인이 살아가는 곳에는 민화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민화는 바로 한국인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1873년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빈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자국의 공예품의 우수함을 인식하고 더욱 더 개발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특히 공예분야에 있어서는 이 박람회를 계기로 당시 영국에서 한창 성행하던 미술공예운동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서구식의 공예개념이 도입되었다.
생활과 감정을 반영한 문예가 일어나, 연애와 금전욕 등 쵸닌생활을 묘사한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가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에 의해 창시되었다. 또한 렌가(連歌)로부터 독립한 17자의 하이카이(俳諧)에서는 마츠오 바쇼(松尾芭蕉)가 예술성 높은 작품을 남겼다.
구송예능 죠루리(淨瑠璃)는 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