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 관련 활동
3.1 운동 후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 입당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활동
1922년 3월, 극동제민족대회에
이르쿠츠크파 대표단 참여
1922년 4월,공청조직의 책임자로 국내파견
1924년 출소 후 신사상연구회 가
조선공산당의 중앙기구를 구성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46년 5월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으며, 조선공산당은 이에 맞서 9월 총파업·대구 10월 항쟁을 일으켰다. 46년 11월 조선공산당·인민당·신민당 좌파가 연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을 결성, 박헌영은
1. 머리말
조선공산당은 1928년 7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일제의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었고 코민테른의 <12월테제>의 지침에 따라 노동자와 빈농에 기초한 당 재건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당 재건운동에 앞장서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당시 일본과 우리나라 반공체제에 탄압을 받으면 역
파견한 사람들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고찰하여 1929~32년 사이에 있었던 조공 재건운동의 구체적인 방안 및 양상을 정리해 보겠다. 특히 기존연구에서 ‘화요파’로 알려진 金丹冶 등의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 및 1930년 하반기 상해를 중심으로 한 김단야 등의 ‘꼬뮤니스트
그룹’의 활동,
해방 이후 반공체제에 의해 철저히 역사의 뒤편에 감춰져야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당당한 우리의 민족투사였다는 것을 다시 각성하면서 오늘은 많은 사회주의자들 중에 ‘이재유’와 ‘이재유 그룹’의 활동, 그리고 그 이후의 다시 결성되는 ‘경성콩그룹’과 ‘박헌영’까지 얘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