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사냥이 가장 가까운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쉽고 조사하기도 쉽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한국 근현대사를 지배했던 반공이데올로기와 빨갱이 사냥의 몇 가지 사례를 분석해보고 유럽 중세에 있었던 마녀사냥과 빨갱이 사냥의 유사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수립하려는 구상을 능란하게 펼쳐 갔고, 한민당은 미군정의 여당으로서 남한 권력의 물리력을 장악함으로써 향후 정권장악을 기대하고 있었다. 김구, 한독당은 임정법통론에 끝까지 매달리면서 비상국민회의(1946.2.1), 국민의회(1947.2.14) 등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남한 정국을 풀어가려 했다
. 김구, 한독당은 임정법통론에 끝까지 매달리면서 비상국민회의(1946.2.1), 국민의회(1947.2.14) 등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남한 정국을 풀어가려 했다. 한편 이승만, 한민당 세력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1945.10.23), 민족통일총본부(1924.6.29), 한국민족대표자회의(1947.7.10)등을 조직하여 정국에 대응했다.
6 ·25전쟁을 맞았다. 관련 의원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전쟁의 와중에 출옥하여 사라졌다.
당시 미국은 이 사건을 다분히 정치적 사건으로 보고 더 이상 체포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 사건 이후 활발히 활동하던 국회는 바싹 움츠러들었다. 의회주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결의 6호 질의에 대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답신
(5) 위 질의에 대한 북조선노동당 답신
(6) 위 질의에 대한 민전의 답신
(7)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에 나타난 규정
(8) 경성법조회 규정
(9) 제헌국회 제정 「반민족행위 처벌법」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