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세력은 전리품의 분급을 통한 대토지와 노예소유자인 만큼 귀족회의의 내용도 그들의 이해관계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권력 구조상 왕과 귀족세력이 공존하고 있더라도, 권력의 무게 중심은 오히려 귀족회의체에게 있었다. 그러나 귀족합의체제는 고대국가의 완성단계인 삼국말기에 이르
삼국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동천왕은 이런 분열을 이용하였다. 오나라와 교류하여 위나라를 견제하였다. 위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로 지내며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 세력을 멸망시켰다.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압력이 거세져 서안평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유주자사 관구검의 반격으로 환도성
전제화이다. 무열왕은 김유신의 후원을 받아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고, 이 때의 전제 왕권 확립은 이후 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무열왕의 직계(直系) 자손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과 관계가 깊다.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세력은 왕권에 눌려 약화되었다.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하고 551년 신라군과 가야군을 동원하여, 귀족세력의 내분에 처해 있던 고구려군을 물리치고서 백제는 한강하류를, 신라는 한강상류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553 년 고구려군과 은밀히 결탁한 신라의 배반으로 한강하류지역을 다시 신라에 빼앗기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정벌에
세력에 의한 것이기에 백제 왕실의 권위 실추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웅진 천도 후에 새롭게 등장한 신흥 귀족세력의 전횡이나 구 귀족들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무마하지 못하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웅진도읍기 무령왕의 위업을 물려받은 성왕은 이제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국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