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것은 향찰이라는 기록의 수단을 얻어 향가로 남게 된 것이며 고구려나 백제에도 이와 유사한 양식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육조말기에 이르면 이제 시가 가와 점차 분화되기 시작하고 음악성이 배제된 문선이 우리 나라에 수용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한시
노래한 시들.
⑤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시들.
대체로 위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의 기준이 북한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한자 서정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설성경․유영대 공저, 『북한의 고전문학』,고려원,1990. p.150)
에 구현된 애국적 감정과 발해의 시가유산
이 시기 애국적주제의
백제를 쳐들어 갔을 때 이들이 없애기 어려운 것이 유기장 유종이었다. 고려 이희민(李羲旼)의 아들 지영(至榮)이 양수척들을 기적에 올리고 세공을 받지 않았다. 뒤에 이르러 사내들은 노를 삼고 여자들은 비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우리나라 기의 시작이다”라 연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신라시대 중엽
, 마를 담는 바구니의 일종으로 해석한다. 일상적 여성의 생활 공간일 수 있는 마 퉁방이 여성의 은밀한 성적 유희의 장소로서도 파악되어질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보였다. 더구나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로 보아 통혼이 있을 수 없었으리라는 점도 이 작품을 민요로 보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른시기의 상고시가는 한국어로 표기된 것이 아니어서 율격을 짐작하기 어렵다. 향가는 넉 줄, 여덟 줄, 열 줄 등으로 노래 전체를 이루는 행의 수효에는 규칙성이 있으나 각 행에 나타난 마디의 수효에 따른 율격은 분명치 않다. 고려가요는 한 행이 세마디로 된 것도 더러 보이지만 대부분의 작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