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파(斥和派)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삼학사(三學士)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책임을 지기 위해 스스로 청진영으로 나아가고, 심양으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17세기 초는 조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조선, 명, 일의 3국의 정세에 중대한 시기이며 이러
시기의 척화파 ․ 주화파의 대립이 가장 좋은 예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반정의 정당성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했다. 왕위계승의 정통성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이 인조정권의 존립마저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의 왕위 계승은 10여년 간의 논란 끝에 원종(定遠君) 추숭전례(追崇典禮)로 정통
화의 실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지역적 개념, 종족적 개념, 문화적 개념 등 세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중 중심이 되는 기준은 문화적 요소라는 것이 대다수 연구자들의 견해이다. 즉, 중화와 이적의 중요한 차이는 거주 지역이나 혈연적 종족이 아닌 유교 정치이념의 시행여부에 달려있다는
1) 명의 쇠퇴와 여진족의 흥기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나라가 몽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은 명과 조선에 대하여 이중적인 종속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대의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 여진의 셋으로 갈라져 있었다. 명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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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전성기(진 흥왕~진평왕, 한강 점유)
7세기
여․수전쟁(612)
여․당전쟁(645)
백제의 멸망(660)
고구려의 멸망(668)
※ 부여의 대가(마가, 우가 등) 나 고구려의 대가(상가) 는 삼한의 견지와 읍차와 같이 최고 통치자는 아니었다.
2. 삼국시대
1) 국가의 분류 : 고대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