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 초에도 의연히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결국 남한산성에서 고립된 지경에 이르렀을 지라도 청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조선의 지식인들로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던 척화파(斥和派)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삼
조선의 지배층이 당면했던 문제점은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정치기반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왕위계승의 정통성 문제로 표면화되었는데 특히 대외문제와 결부시켜 왕위계승의 문제 제기가 심각했던 인조반정과 호란을 전후한 시기의 척화파 ․ 주화파의 대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는 새로운 국토를 결정하는데 크게 고심하였다. 조선의 새 국토는 대전 근교의 계룡산과 지금 서울의 무악 등이 물망에 올랐다. 이 가운데 계룡산이 가장 유력하였다. 태조의 계룡산 정도는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계룡산은 풍수상의 신비성과 신도조성 등으로 인하여 이후 정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