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적 배경 외에도 鄕歌가 불려진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연구도 했어야 하나 일천한 지식으로는 기본적으로 사상시킬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당연히 이러한 모든 연구가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는 문학은 그것이 만들어지고 불려지는 당시의 모든 현상을 총체적으로
화엄경》의 원만게(圓滿偈)를 하나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종형(從兄) 선균(善均)을 따라 부흥사(復興寺:황해도 금천군 남쪽에 있던 절)의 식현(識賢)을 뵙고 출가하였으나 식현의 자질이 뛰어나지 못함을 알고, 영통사(靈通寺:경기도 개성에 있던 절)의 의순공(
Ⅱ. 균여의 사상(思想)
1. 시대적 배경
균여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게 좋다. 정치 사회적 배경과 불교 사상사적 배경이다. 정치적으로는 신라천년의 사직이 붕괴되고 새로운 고려 왕조가 탄생, 정착되어 가던 과도기에 균여가 살았으며, 단지 그런 시대에
II-1. 신라말기(후삼국 시대)의 왕건, 견훤, 궁예
1. 궁예
정치적 감각: 구고구려계 지방 세력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옛날에 신라가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져서 풀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고 말하는 등 고구려 부흥 주
사상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민영규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의 조성은 확실히 법화경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천불탑은 법화경과 꼭 유관하지는 않다. 따라서 이것으로는 법화경 사상에서 유래했다고 보기에는 논리상 미흡하다. 또한 화엄사상에 의해서 조성되었다는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