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있어서도 1949년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후 다량의 무기를 소련으로부터 공급받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던 북한도 한국전쟁이후로 조금 달라지게 된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과 그에 따른 소련 정치지도층의 내분 및 후르시초프에 의한 반스탈린 과 서방과의 평화공존 옹호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북한에 통보하였으며, 1996년 9월 10일 이후로 효력이 상실되었다.
1999년 3월 러시아와 북한은 “즉각적인 군사개입 및 지원” 대신 러시아와 몽골, 베트남과 우호관계 기본조약처럼 “안보위협 발생시 지체 없이 상호 접촉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신조약을 가조인한 후 2000년 2월 9일 평양에서 ‘조ͨ
북한 이해와 통일교육이라 생각한다. 북한과 통일교육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 이전에는 정부의 통제와 규제위주의 정책으로 소수의 학자들만이 통일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연구 성과가 미흡하였다. 김대중 정부 이래 노무현 정부에서도 햇볕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지만, 우리는 북한 교육을 제
정책노선의 공유 및 협력관계는 다분히 지정학적인 배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미-일 태평양 중심의 해양세력과 중-러 유라시아 대륙세력 사이의 공통적인 입장은 한반도 통일 이후 양 세력의 세계패권과 관련 정치-경제적 지배력에 대한 공통적인 운명에 직결되어
관계에 있어서 남한이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북한을 앞질렀으며, 특히 남한이 러시아 중국 및 구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정상화를 이룩함으로써 북한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와 같은 고도의 체제생존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북한은 군사력 증강정책을 견지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