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15·16세기 약 200여 년 간 전성기를 보내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외적 요인과 사기제조에 있어서의 제조상의 문제 등 내적 요인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분청사기는 바탕흙과 유약에 있어서 말기의 상감청자(象嵌靑磁)와 비슷하여 불순물이
조선시대의 또다른 자랑은 백자다. 조선 초기 나라 안에는 무려 324개의 도자기 제작소가 있었다. 그중 국가에 납품할 수 있는 양질의 자기소는 4곳 뿐이었다. 그리하여 경복궁 내 부엌일을 맡아보는 사옹원(司饔院)이 서울에 가까운 광주에 분원을 차려놓고 질좋은 백자를 본격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
Ⅰ. 도자기 상감청자
고려 청자의 대명사인 상감(象嵌)청자는 대체로 12세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북한의 발굴자료에 의하면 11세기 초 개성 진봉리에서 상감청자가 나왔다는 보고서가 있어 늦어도 11세기부터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상감기법은 문양을 파고 움푹이 패인 부분
분청사기 가운데 가장 세련되어 관청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인화문은 경상도 지방에서 유행하였으며 ‘內贍’, ‘長興庫’ 등의 관사명의 명문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3) 조화 박지 기법
상감이나 인화보다 훨씬 자유롭게 문양을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이다. 조화는
분청사기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 청자가 쇠퇴하는 과정이었다. 철분이 많은 도토로 함부로 만든 자기의 빛깔은 청색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면을 백토로 분장한 회청자가 분청사기로, 청자가 새롭게 변모된 자기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철분이 많은 소지에서 청자의 기법을 계승하여 상감수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