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가운데 가장 세련되어 관청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인화문은 경상도 지방에서 유행하였으며 ‘內贍’, ‘長興庫’ 등의 관사명의 명문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3) 조화 박지 기법
상감이나 인화보다 훨씬 자유롭게 문양을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이다. 조화는
한국, 만주시베리아, 북부유럽을 연결하는 빗살무늬토기 문화와의 상대적 관계와 토기의 개별성을 추측하게 한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는 한반도의 북부지방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청동기와 무문토기에 의하여 빗살무늬토기는 점차소멸하고 한반도는 무문토기를 포함한 청동기문화 단계로 발전하게 된
조선시대의 또다른 자랑은 백자다. 조선 초기 나라 안에는 무려 324개의 도자기 제작소가 있었다. 그중 국가에 납품할 수 있는 양질의 자기소는 4곳 뿐이었다. 그리하여 경복궁 내 부엌일을 맡아보는 사옹원(司饔院)이 서울에 가까운 광주에 분원을 차려놓고 질좋은 백자를 본격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
분청사기는 16세기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통하여 일본에 전파됨으로써 일본의 자기 발전의 시점이 되었다.
당시 일본은 자기를 생산할 수 없는 도기를 사용하는 수준이었으나 일본인들이 도자기 전쟁이라고 일컬을 만큼 많은 한국의 도공을 일본으로 끌고 가 그들로 하여금 도자기를 생산케 하여 비
머리말
8000여 년의 한국 도자기 역사 가운데서 약 200여 년 동안인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만들어졌던 분청사기는 한국인의 감정을 구김살 없이 보여주는 그릇입니다.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1940년경 미술사학자이자 미학자였던 고유섭(高裕燮)선생이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