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의 기발함을 말해주는 예로 ‘백자 달항아리’(높이 42.5cm, 18세기 전반)를 들 수 있다. 원래 수동식 물레로는 큰 항아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중국이나 일본, 유럽의 도자기 중에는 조선의 달항아리만큼이나 큰 항아리가 없다. 조선의 도공들은 커다란 대접 두 개를 서로 잇대어 둥그스름한 큰
분청사기의 생산은 점점 소규모화되면서 민간용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더욱이 중앙관요의 영향이 지방으로 파급되면서 백자의 생산이 계속 증가되었으며,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이 남아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Ⅱ. 분
기법이었는데, 고려시대 사기장인이 처음으로 청자에 응용한 것이며 다른 나라의 도자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유일의 장식기법이다.
청자의 문양에는 상감문 외에도 음각문, 양각문, 뚫어서 장식을 가한 투각문, 백토로 문양을 그린 퇴화문, 철분을 원료로 한 철사안료로 그린 철회문(鐵繪
사기장인(沙器匠人)들이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고 왜란 후 상당기간 가마운영이 어려운 상태였으며, 특히 분청사기가 완전히 소멸되어 백자문화 일색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백자의 제작수법과 기형 등이 왜란 후에도 일정기간 왜란 전과 흡사한 상태이므로 17세기전반까지를 전기로 구분한다.
17세기
무늬토기를 기준으로 하여 선빗살무늬토기는 그의 유형에 따라 무문토기와 융기문토기로 나뉘어지며 제작방법이 소박하고 태토(도자기만드는 흙)가 거친 것이 특징이다. 기원전 1000년경까지 신석기시대문화를 대표하게 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빗 모양의 도구로 토기의 표면을 누르거나 긁어서 다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