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양위한 뒤, 德安殿을 지어 精舍로 삼고 念佛三昧로 만년을 보냈는데 그는 평소 佛力에 의하여 國祚를 영구히 하며 과거의 죄과와 양심의 가책을 면하여 구원받으려 했었다. 태조는 당시에 鄭道傳, 趙浚 등의 배불론에 심각히 처하였으나 숭불신념을 버리지 않고 禪敎 兩宗에 대하여 외호를 아끼
불교전적(佛敎典籍)의 인쇄를 먼저 효시케 한 것은, 신라시대의 불교연구와 신앙 활동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자 그것이 대내적으로는 불교를 이상으로 하는 신라왕조(新羅王朝)의 자주적 토대를 구축하려는 국가정책과 영합하여 불교문화를 자못 흥륭(興隆)케 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당시 동양에서의 문
불교경전은 이른바 대승삼장으로서, 이들은 부처가 멸도하신 후 약 600여 년 뒤인 기원전 1세기쯤에 일어난 대승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경전들이다. 부유층이나 왕실이 제공한 승원(僧院)을 중심으로 출가주의를 내세우며 경전을 연구․주석하면서 고답적인 독신주의에 치우쳐 있던 당시불교계를 반
대장경이란 무엇인가
고려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을 말한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경판은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현종대부터 문종대에 걸쳐 완성한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崔瑀) 등이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