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의 출현이 있기 전에는 예배 대상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이유는 부처의 열반 후에 사람들은 함부로 부처의 형상을 본뜨거나 그의 얼굴을 조형한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들 불경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것이 바로 부처 사후에 나타나는 무불상의 시대이다. 하지만 이들 불교도
이것은 29번째 부처님이다"
라고 한다.
제작연대인 기미년은 양식상의 고찰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 약 100년이 지난539년으로 추정되므로 현존하는 기년명 불상 가운데 가장 연대가 앞선 상으로, 삼국시대불교조각사에서 중요한 기준작이다. 또한 현재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작 연대
시대의 불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고 손과 다리의 조각표현에는 별로 입체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의 각기 특징있는 불교미술은 일본에도 영향을 주어 호오류지(法隆寺)의 목조관음상이나 고오류지(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같은 상에 그 영향
중이 되어 부처를 받드는 일을 허락하였다.
⑤ 10년 봄 양(梁)에서 입학승(入學僧) 각덕(覺德)과 더불어 사신을 파견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보내오니 왕은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영접하게 아였다.
《삼국유사》에서도 《삼국사기》와 그 내용이 비교적 유사하지만,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
법의는 매우 두꺼우며 두 팔에 평행된 옷주름이 나 있고 두 손은 왼손을 밑으로 오른손을 위에 얹어 서정인 같은 인상이다. 불상 뒤에는 광배가 붙어 있던 흔적이 있다. 예를 들면 동경대학 공학부 소장의 금동불좌상이 이러하다. 이것은 5세기경 중국의 남조나 북조에서 공통되게 유행 하던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