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퇴계의 무오사직소(1558년)
I. 왕이 사람을 쓰는 도 – 현우예양(賢愚禮讓)의 이치
1. 일의 경중에 따라 큰 일은 재능이 큰 자에게, 작은 일은 재능이 작은 자에게 맡겨야 하며, 크고 작은 일에 모두 합당치 않을 경우 물리치는 것이 등용의 도.
2. 옛 성현의 말
i. 맹자: “가까운 신하들이 모두 ‘
퇴계는 이 같은 문제점을 파악하고 장마철에 내린 빗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가물 때에는 농수로 활용해 흉년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보고, 곧 저수지를 시범적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것을 널리 확대하도록 했다. 현재 단양천의 복도소는 퇴계가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
1. 남명조식
(1) 남명조식의 생애
조식은 1501년(연산군7)~1572년(선조)의 사람으로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건중, 호는 남명, 생원안습의 증손으로, 승문원 판교 언형의 아들이다.
26세 이전까지 한양에 거주하였으며 기초학문 학습과 과거를 준비하였고 이후 산해정, 뇌룡정, 산천
一. 이규보 李奎報 (1168 ~ 1241)의 칠언시 감상
【 작가의 삶 】
이규보는 고려 의종 22년(1168) 음력 12월 16일에 당시 황려현(黃驪縣)으로 부르던 오늘의 경기도 여주에서 호부시랑을 지낸 이윤수(李允綏)와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주. 초명은 인저, 자는 춘경(春卿)이었으며, 아호는
남명조식과 퇴계이황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