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자신의 상황
1. 병들어 직무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
2. 지금 상황에서 관직에 나가는 것은 벼슬을 탐하고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는 것임.
III. 자신의 사직 의향에 대한 세상의 반응
1. 세상을 깔보고 제멋대로 편하려고만 하는 것 아니냐?
2. 사양하는 체 겉으로 꾸며 이름을 구하는 것 아니냐?
남명이 그의 사상 속에서 항상 민생을 잊지 않게 하였다.
단성소(丹城疎) 1555년(명종10)단성현감 조식이 올린 상소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글러먹었고 나라의 기반은 이미 무너졌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미 멀어졌습니다…말단 관리들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며 주색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 하고 있었으며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또한 남명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 하고 있었으며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또한 남명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실학의 비조로 꼽히며,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한 의병장과, 정치·학술계를 주도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우리 나라 교육사에 있어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