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조식과 퇴계이황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
1. 서 론
퇴계이황과 율곡 이이, 남명조식선생은 조선 전기 유학의 거두로 인식되지만, 치열한 당파 싸움과 정적들의 견제속에 정치에 있어서는 자신의 뜻을 널리 펴지 못하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을 도모하는데 일생을 바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당시 사회는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억압이 한창이던
이 황은 서 경덕이 수족의 동작 및 보고 듣고 하는 감각작용을 기지묘처(氣之妙處)라고 한 데 대하여 그를 지기묘처로만 설명하고 이에 귀속시키지 않는 것은 편견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기의 작용이 아니라 이의 작용이라고 하였다.(퇴계집 권25 답정자중별지)
이 황은 또 왕 양명의 주관적
서론
남명조식이라고 하면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구체적인 사상, 교육관, 인간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는 어름어름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남명조식은 퇴계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뛰어난 유학자, 많은 의병 제자를 배출한다는 사실 정도였다.
남명조식의 정치·사회적 의미,
남명조식과 퇴계이황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