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 하고 있었으며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또한 남명조식의 학문은 어떠한 특징과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퇴계이황의학문과 더불어 알아보도록
실재하는 이를 부정하고 심즉리라고 하여 이를 주관적 심과 동일시한 왕 양명의 주관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다. 이 황은 넷째 부분에서 왕 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설을 반대하였다. 형기(形氣) 즉 물질에서 발한 심(이 황은 이를 도심이라고 불렀다)은 그 출발한 지행도 합일한다면 학문이 무
남명의 사상은 경상우도라는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사림파의 학문세계를 추구하였는데, 특히 김해의 산해정, 합천의 계부당. 뇌룡정, 산청의 산천재 등지는 그의 사상적 기저를 발현하는 대표적인 교육장소였다. 남명학파의 지역적 범위는 대체로 진주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김해, 밀양, 청도,
남명이 그의 사상 속에서 항상 민생을 잊지 않게 하였다.
단성소(丹城疎) 1555년(명종10)단성현감 조식이 올린 상소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글러먹었고 나라의 기반은 이미 무너졌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미 멀어졌습니다…말단 관리들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며 주색
◆ 수양론과 궁리론
퇴계학문의 기본적 성격은 주자를 표준으로 하여 도학의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의 사상에는 성리설의 개념적 분석체계와 더불어 수양론의 실천방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도학의 학문적 기본방법을 거경(경의 생활화)과 궁리(진리탐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