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의 성립에 기여한바 적지 않다. 그런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그의 업적에 대한 정리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황의돈의 생애와 활동, 주요저작 등을 통해 그의 역사인식, 해원사학의 성격과 위치에 대해 살펴보고, 늦었지만 최근에 와
* 오늘의 역사학은 영화와 왜 만나야 하는가?
1장. 영상 시대에서 역사학의 위기
1. 사학사적으로 나타난 역사학의 위기.
1) 정치사 혹은 사건사 중심의 역사학이 산업시대에 나타난 사회 변동과 사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학사에서 이러한 역사학의 위기는 ‘
사학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정인보를 비롯하여 문일평, 손진태를 중심으로 그들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조사하였고, 그것을 통해 작게는 후기 문화사학, 크게는 후기 민족주의 사학이란 무엇인지, 과연 그것은 사학사적 입장에서 어떤 의의를 갖고 어떤 한계점이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역사학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동안 남․북의 이데올로기 차이로 인해 우리에게 쉽게 다가올 수 없었던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백남운의 역사관은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그가 제창한 역사란 어떤 것인가? 본고에서는 이러한 그의 삶과 역사인식, 그리고 사학사적 의의에 대해 알아보고자
양자에 공통된 것이었으며, 그들의 민족주의사관은 관념적 성격이 강하였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역사학과 역사관을 토대로 그들의 민족주의사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한국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을 성립시킨 사학자로 평가받는 그들의 사학사적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