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사]해원 황의돈의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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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학사]해원 황의돈의 역사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황의돈의 생애와 활동
3. 주요 저작을 통해본 해원의 역사인식
가.『대동청사』
나.『신편조선역사』
4. 민족사학으로서 해원사학의 성격과 위치
5. 맺는말

본문내용
1. 머리말
1920년대에 민족주의 사학자로 분류되는 신채호와 박은식이 해외에서 활약하던 시기에 국내에선 식민사학과 대항하면서 국사 연구를 하던 인물들은 황의돈․안확․권덕규․장도빈 등이 있다. 일제하의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지녔으면서도 각기 독자적인 학문적 영역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문화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체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으로 주목된다.
그런데 같은 문화사관의 입장이라도, 황의돈은 독특한 사론과 함께 일찍부터 한국사의 체계화를 꾀함으로써 초창기 근대역사학의 성립에 기여한바 적지 않다. 그런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그의 업적에 대한 정리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황의돈의 생애와 활동, 주요저작 등을 통해 그의 역사인식, 해원사학의 성격과 위치에 대해 살펴보고, 늦었지만 최근에 와서라도 그를 민족주의 사학자의 대표자로 불리어지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2. 黃義敦의 생애와 활동
해원은 개항이후 외세의 침투로 국가의 위기의식이 어느때보다 고조되고 있을 무렵인 1887년 음력 9월 2일 충남 서천군 문산면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전통적인 유가(儒家)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 밑에서 한학을 수학한 그는 20세인 1906년까지 전통적인 한문학의 습득에 정진하였다. 1907년 21세의 나이로 군산고등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하여 1년 만에 수로한 후, 약 2년간 서울과 일본을 왕래하며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접하였다.
그는 곧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갔으나 여의치 않자, 해외 독립군기지인 북간도에 들어가 서전서숙(瑞甸書塾)의 후신인 명동학교에서 김약연․정병태 등과 함께 구국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국사교재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그의 첫 역사저술이자 통사인『대동청사』를 집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후 잠시 귀국한 해원은 국권상실에 분개하여 다시 중국으로 향하던 중 안석․이경구․이승훈을 비롯한 민족인사들의 권유로 안흥․육영․오산․대성하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특히 1911년 대성학교에서 문일평과 함께 역사를 담당했던 그가 항상 시험제목으로 ‘국권회복’이란 문제를 냈으며, ‘폭탄과 암살이 최선책’이란 답안에 만점을 준 것이 탄로되어 학교가 폐쇄되었다는 일화는 그의 투철한 구국의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1. 심승구,「해원 황의돈의 역사학연구」,『북악논총 9』, 국민대학교, 1991
2. 조동걸 외 공저,『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하』, 창작과 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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