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돈의 생애와 활동, 주요저작 등을 통해 그의 역사인식, 해원사학의 성격과 위치에 대해 살펴보고, 늦었지만 최근에 와서라도 그를 민족주의 사학자의 대표자로 불리어지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2. 黃義敦의 생애와 활동해원은 개항이후 외세의 침투로 국가의 위기의식이 어느때보다 고조
여순 감옥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 주로 아나키스트 활동에 매진하였으며 그의 역사관계 논문과 저서들이 이때 거의 발표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발표된 그의 역사 관련 저서 ․ 논문들은 1925년까지 저술된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1921~1925년경에 쓰여 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대사적 의의는 임박한 식민지화의 위기에 전통사회가 정치 수준에서 어떻게 대응하였던가라는 문제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재작년, ꡐ1894년농민전쟁ꡑ의 백주년을 기념하여 수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한 집중적인 논의가 있어 왔다. 그 가운데 한국역사연구회가 다년간에 걸쳐 근대사연구
민족사학(民族史學)의 길을 열어나간다. 당시의 많은 역사가들은 우리 민족의 이념적 독립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신채호/박은식의 등장과 관련 된 시대적(역사적) 배경
당시 조선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 일제는 정체성론(停滯性論) 및 타율성론(他律性論)등의 논
시대의 현실적인 바다를 살펴보자.
고려 말에서 조선 초는 한국사에서 왜구가 가장 기승을 부렸던 때이다. 당시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수준을 넘어서 대 선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수가 수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고려 말의 왜구는 도서지역과 해안가를 넘어서 내륙 깊숙한 곳까지도 노략질을 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