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의 귀속문제, 일본의 교과서에 보이는 역사왜곡 문제, 독도의 영유권에 관한 일본의 외교적 쟁점화 시도 등의 사안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역사 내지 (한)국사의 교육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강력하게 제기된 바 있다. 이장에서는 중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의 문제점과
중국의 사회와 문화교육을 개혁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1862년 양무파(洋務派)는 북경에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북경동문관(北京同文館)을 설립하였으며, 계속하여 외국어학교, 군사학교, 기술학교 등과 같은 몇몇 신식학교도 속속 개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청정부에서는 국외로 유학생도
중국·한국·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유교는 아직까지도 극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에 사상적 기반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仁은 넓은 의미에서 `사랑`으로 규정되며 이외에도 인간다움, 동정, 心, 善, 완전한 덕, 도덕적 탁월성 등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이런 仁은
사학 12도'가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광종 대부터 실시된 과거에서는 문(文)에 능통한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중국 고사에 대한 역사적인 지식과 교양이 얼마나 풍부한 지를 시험하였다.
유학 이념이 절정을 이루었던 조선시대에는 공교육을 대표하는 국립 학교 성균관 뿐 아니라 지방의 학당과 향교,
사학자들을 포함시켰다. 당시 일본인 학자 중에서 이마니시 류는 단군조선을 고려 중기 이후의 조작으로, 진번군은 충청-전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한국 고대사를 중국과 일본에 의한 피지배와 굴욕의 역사라 주장하였다.
2) 식민사관 극복과정과 랑케의 실증사학
독립이 된 이후, 우리나라는 랑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