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삼고 책임지울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또한 사회는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볼 때 진정한 인간의 구원은 사회윤리적 접근이 없이는 일방적이며 냉혹한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원불교 천도의식의 천도법문의 인식과 설법의 방
사회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설명의 도구가 되는 지식이란 불확실할 뿐 아니라 어떤 형태의 지식이나 지식의 내용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소서사들의 집합체가 우리 사회의 구성이며 그들 담론간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매체, 뉴미디어
끝에 가면 공산주의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는 체질적으로 공산주의에 젖어 있었다. 나는 이병주에 대해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되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가끔 그와 어울리며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는 태도를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만계와 일계의 교관이었던 오다카 가쓰에(뒤에 일본사관전자센터
사회주의자인 가네코 기이치(金子喜一)와 교우를 통해서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도 접했다. 특히 휘트먼·입센·톨스토이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삿포로와 교토의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지만, 1910년에 동생들과 동생의 친구인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
지상주의가 자아낸 사회․정치적 모순에 괴로워하던 이들 가운데는 사학을 해결의 대안으로 삼았다. 때맞춰 중국에서 건너온 서구문물은 새로운 세계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해방 이후 불어 닥친 서양 세력의 강타는 얼마 남지 않은 자의식마저 날려버렸고,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전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