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학계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리학자가 이 문제를 다루었을 정도로 한국 유교의 전개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2. 사단칠정 논변과 퇴계ㆍ율곡성리학의 정립
대부분이 재지 중소지주(在地
퇴계는 오로지 인심에 있어서 이기를 논하고 율곡은 태극론을 포함하여 우주론과 인성론의 전체 속에서 이기를 파악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자료는 1. 퇴계의 ‘이(理)’와 사단칠정, 성리학의 이(理), 2. 율곡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와 도덕 및 욕망, 3.. 조선의 실학자들이 고민했
Ⅰ. 성리학(주자학)의 성격
조선의 성리학은 퇴계와 율곡의 학설을 계승하여 전개되어 가는데 퇴계의 이기불상잡의 강조, 사단칠정의 이기호발이라는 입장과 율곡의 이기혼륜무간 사단칠정의 기발이승일도의 입장이 각각 그들의 문도로 이어져 크게 보면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라는 두개의 학파가 양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의 도식은 문제가 있다. 사단칠정을 기준으로 하여 조선의 모든 유학자들을 영남(주리)과 기호(주기) 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카하시 본인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기준에 맞지 않는 학자들을 “농암문파“라 하여 새로운 항목으로 설
성리학을 완성한 대표적인 두 인물로서 그들의 후학들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주도한다. 퇴계와 율곡은 주자(朱子)성리학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면서도 근본적인 이해방식에 있어서 차이를 나타내고, 이는 삶을 지배하는 사고방식과 연관되며 후대에는 이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퇴계(영남)학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