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참여파 학자들과 고려 왕조에의 절의를 강조하며 새 왕조에의 참여를 거절한 절의파(節義派) 학자들로 나뉘어 입장 차이를 보이다가, 포은 정몽주의 암살 사건 이후로 절의파 진영의 유학자들은 향촌 사회로 뿔뿔이 흩어져 제도권의 지평선 밖으로 사라진다.
사단칠정논쟁 정이천은 희ㆍ노ㆍ애ㆍ락ㆍ애ㆍ오ㆍ욕의 7정을 인의예지신의 성과 직접 결부시켰다. 훗날 중국에서는 아무도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문제점을 지적해주지 못했다. 한국성리학의 사단칠정 논변은 바로 이 문제에서 비롯한다.
정이천의 성정론을 이어 완성시킨 주자의 정이론에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
사단칠정논변은 주장과 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재비판과 재재비판이 이어진 치열한 논리 싸움이었다. 여기에는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순수하게 학술적인 합리성과 엄밀성만이 추구되었다. 이를 통해 중국의 주자학이 한국의 성리학으로 토착화되는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유학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