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몫으로서의 교만이 아니라, 신이 내린 섭리에 관한 교만이라고 생각한다. 즉 신이 곧 진실이라고 한다면 그 진실을 왜곡하는 행동, 신을 부정하고 진실 되지 않은 사실을 더욱 진실 되게 꾸미는 짓이야 말로 인간의 지혜로 신에게 거역 혹은 도전하는 죄에 해당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철학에
것이 대단한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소멸과 생성의 의미-. 그리고 자연철학에 대한 개괄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는 어쩌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하나(hen)에다 하나를 더할 경우에, 더 하여진
인간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성의 윤리를 실현할 때,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다’라는 명제에는 문제가 있다. ‘과연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과 탐욕과 정열 같은 것들이 “이성”이란 틀 속에서 규제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인간이 이성을 진실을 은폐하는 도구로써 쓰지 않았는가?
자신이 품으면서 현자들을 찾아다닌다. 주54. ‘겨우겨우’는 자신이 하려는 짓이 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신이 품고 있는 것으로 자칫 비칠지도 모를 불경한 짓일 수도 있겠기에 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 그리하여 이 사람을 여러 모로 지켜본 즉-제가 이름을 댈 필요는
소크라테스의 애지(愛知) 속에 그 연원(淵源)이 있다고 생각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인간적 지혜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인간의 최대사(最大事)를 묻는 일에 있는데, 이 물음은 그 최대사가 아직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무지(無知)의 자각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애지는 이 근원적인 물음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