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은 16세경에 비로소 김하서, 김윤제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학업을 쌓기 시작했고, 특히 호남지방의 세족인 광산김씨의 우산 아래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를 맺으며 호남 사림(士林)의 일원으로 성장한다.
27세에 이르러 정철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는데, 그 무렵 정계는 소윤의 영수인
성산(별뫼)의 모습을 연결시켜 노래한 성산별곡은 정극인의 상춘곡,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 정해정의 석촌별곡으로 이어지는 호남 가단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송강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지방의 해금강, 내금강, 외금강 등의 절승지와 관동팔경 관동팔경 : 관동팔경은 관동
정철은 효와 충을 가장 중시 여기면서 살아간 인물이며, 협애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청절한 인물이었다.
정철은 을사사화로 호남가단과 인연을 맺었고, 그의 잦은 치사는 그의 문학적 완성도를 위하여 필요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훈민
노래로 작성되어 조선시대 문학작품의 독특한 흐름을 알 수가 있다. 가사의 형식은 3·4 또는 4·4조의 연속체, 8·8조의 연속체 등으로 되어 있어 자유롭게 작가들이 만들어 가사를 통해 작가의 희로애락을 한눈에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사문학은 선비로부터 시작하여 일반 서민들도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