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故國原王)을 일명 국강상왕이라고 하였음으로(『삼국사기』) ‘국강상’은 ‘국원(國原)’이라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3.시호(諡號)와 장지명(葬地名) 그리고 수묘인...
광개토왕뿐만 아니라 그보다 이전에 재위한 왕들의 시호에도 장지명이 호의 첫머리에 나온다는 점을 볼 때, 당시 고구려왕
광개토왕의 號중 '국강상'은 그의 능묘가 위치한 곳의 지명이다.
이처럼 광개토왕의 號에 그의 葬地名을 넣은 것을 통해 당시 고구려왕실에서 先王 곧 광개토왕의 묘역과 능묘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 중 수묘인 관계기사를 검토하고 그를 통해 고구려의 수묘제 운영의 실태,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그 뒤 신묘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p255~256
Ⅲ.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정복활동과 대외관계
1.정복활동
광개토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인 동시에 유능한 통치자였다. 광개토대왕대 고구려의 정복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실질적인 농경지의 확보와 민호의 획득을 통한 국력배양에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전제
예를 들면 추모왕이 알을깨고 태어난 천제지자라는 기술은 신화적이지만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것은 구체적인 것이다.
그러한 조상왕의 권위는 혈통을 통해 후손에게 전달되고 광개토왕을 거쳐 장수왕에게까지 전이되어 왕통보는 조상왕과 후손왕을 동격화 한다.
비문이 신화적인 추모왕의 유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