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 왕실의 계보와 약력을 기록하였고, 둘째 부분에는 광개토왕의 업적 중에서도 특히 각 방면에 대한 정복기사를 기록하였으며, 셋째부분은 광개토왕의 능묘를 지키는 수묘인에 관한 규정을 언급하였다.
이번 발제에서는 최근에서야 다
광개토대왕대 고구려의 정복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실질적인 농경지의 확보와 민호의 획득을 통한 국력배양에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전제왕권의 자존적 대외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인국에 대한 정토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주 정복대상에 대하여는 그러한 복속관계를 구체화하고자 하였던 점에 있다
광개토왕이 순시차 평양성에 갔더니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왕에게 고하기를 “왜인이 우리 국경에 가득히 들어와서 城池를 파괴하고 있으니 구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신라를 구원하기 위한 마치 종주국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정한다는 것이다. 이엉 영락 10년인 400년에 5만의 대
4면에 당시 유행하던 연서체로 1,775자 ( 동남 1면 11행 449자, 서남향 2면 10행 387자, 서북향 3면 14행 574자, 동북향 4면 9행 369자 ) 에 달하는 비문을 새겨 넣은 것이다. 글자의 규격은 크기가 고르지 못하여 큰 것은 길이가 16cm, 작은 것은 약 11cm 정도인데 일반적으로 14-15cm 정도 크기의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대하여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라는 의문을 갖기 보다는 책 속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것을 만족하는 것에 그치고 이렇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정설로써 받아들여진 역사를 기계적으로 수용하고 역사에 관해 조예가 깊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