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계명성이라고 호칭되는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4?-28).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요 상위 귀족의 아들인 해밀턴은 프랑스의 파리와 루뱅에 유학하여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접한 후 귀국하여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해밀턴은 대주교 제임스 비튼
영국의 남성 후사를 보좌로 확정하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헨리 8세는 튜더왕조를 이어나갈 상속자가 필요했으나 캐더린은 대부분 유산하고 겨우 딸 메리(Mary) 하나만 낳았기 때문이다. 헨리가 혼인취소를 요구하자 교황 클리멘트 7세는 그의 요구에 응하려 했으나 캐더린의 조카인 로마 황제 찰스 5세
헨리 8세)
1) 헨리 8세의 생애
헨리 8세는 헨리 7세와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우수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라틴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헨리 8세는 형인 아서 튜더가 첫 아
1.서론
16세기의 유럽은 종교개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로마는 더 이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교회와 교황을 신적 존재에서 끌어 내리고 왕과 상인들을 급부상 시켰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사회의 봉건제도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었고 이 사
종교회의에 의해 주도되는 교회 정치제도의 마지막 주창자로서, 당시 파리에서 돌아온 당시의 냉철한 지식인, 신약주석가였으며, 당시 성직자들의 교훈과 생활을 신랄하게 공격한 윌리암 아르스(William Arth)를 옹호함. 스코틀랜드의 장래를 위해 프랑스와 가깝게 지내기보다는 영국과의 평화 관계 유지